CEO 칼럼

발행년도 2023년 12월
제목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강원도로 여름휴가를 갔다가, 고성군 화진포에 있는「이승만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진입로가 좁고 시설이 노후하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관람 도중 계속 코를 찔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을 재현한「밀랍 인형」은 먼지가 눌어붙어 시커먼 모습이었고, 생전 사용했던 소파와 가구류 역시 별도 보존 처리가 없어 훼손 상태가 심각했었습니다. 보관되고 있는 유품과 자료들 역시 관리가 되지 않아 곰팡이 냄새와 자국이 선명했고, 파리 ․ 모기 등 죽은 해충들이 즐비하여 이곳이 과연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이 맞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 건국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대한민국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세계 각국을 돌아보면 어느 나라이건 그 나라 국부(國父)의 동상이나 기념관을 지어 기리고 추앙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행히 8.15 광복절을 맞이하여「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4.19혁명 인사와 진보 정치인 등 과거 이 전대통령과 반대 입장이었던 사람들도 다수 참여하는 좌우를 뛰어넘는 “화해의 역사„로 건립될 것이라 합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 5명도 참여하는데, 이승만의 아들 이인수를 비롯해 박정희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은 아직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다는 문제의식에 공감을 갖고 정파와 진영을 초월해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합니다. 건립 추진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건국이념이 무엇이고, 우리 국민들이 어떤 난관을 극복하여 오늘과 같이 자유롭고 번영된 민주 국가로 키워 왔는지를 기록하고 알리는 기억의 공간이 될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우남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황해도 ‧ 평산군 ‧ 능내동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는 서당에서 고전을 익혔고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양의 신학문과 정치사상을 수학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일간지「매일 신보」를 개간하여 근대 한국 언론의 새 지평을 열었고, 근대적 시민운동 ‧ 개혁운동에 참여하면서「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5년 7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옥중 도서실」을 운영하고 각종 논설을 언론에 기고하여 시민의식을 일깨웠으며, 독립을 향한 열망과 정치사상을 망라한「독립정신」을 집필하였습니다. 출옥 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였고 하버드대 석사 프리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YMCA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교육 증진과 신앙 성장에 힘썼습니다. 이후 하와이로 건너가 출판 및 언론 활동, 교회 및 교육기간 설립 활동에 주력하며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3‧1운동」의 흐름과 같이하여 상해 프랑스 조계에 수립된「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한국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미증유의 혼란 상태에서「반탁운동」을 주도하고 유엔 감시 하에서 총선거가 실시되도록 지원하였고,「제헌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헌법」과「정부조직법」의 제정 작업을 총괄하여 헌법에 따른 민주공화국이 수립될 수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196명중 180명이라는 압도적인 표를 획득하여 이승만은「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유엔으로부터「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국 등 유엔군의 즉각적인 개입을 실현시켜 “한반도 공산화„를 저지하였고, 정전협정의 체결 과정에서 미국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여 1953년 10월「한미 상호 방위조약」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전쟁 후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의 안전장치 하에서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통해 정치적 ‧ 경제적 재건 ‧ 발전을 이룩하였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 대국(?) 군사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하야하였고, 하와이로 가서 머물다가 1965년 호놀룰루의 요양원에서 영면하여 가족장을 치른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역대 대통령은 누구나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으로 하야한 독재자라는 과오의 측면이 있지만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성사시켜 안보와 번영의 주춧돌을 마련한 공로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진주했던 미군이 1949년 6월에 철수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후 아무런 안전보장 조치 없이 정전 협정만 체결하고 한국을 떠나게 되면 “제 2의 6.25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던 이승만은「벼랑 끝 전술」로 한미 조약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외교의 달인이고 미국에서 박사까지 받은 그는「정전협정」체결을 서두르던 미국에 “전쟁시 즉각 개입„조항을 포함한「한미 상호 방위조약」이 먼저 합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공 포로 석방 등 가능한 조치들을 실행하였습니다. 한미 동맹은 제 2의 남북 전쟁을 억제할 수 있었고, 1988년까지 무상 55억 달러를 비롯한 유무상 군사 원조를 통해 우리 군사력은 세계 6위권으로 도약하였고, 이제 다양한 무기 수출의「방산국가」로 성장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국방비를 절감하여 튼튼한 안보로 수많은 외자유치가 가능하였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는데「일등공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우 이영애씨는,「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건립을 위한 범국민 모금 운동이 시작되자 바로 5000만을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파적 공세를 예견한 듯, “저희 가족은 김대중 ‧ 노무현 대통령 재단에도 후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좌파 진영은「가짜 뉴스」까지 동원하며 비난과 공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과오를 감싸자는 것이 아니라, 과오는 과오대로 역사에 남기되 공(功)을 살펴보며 화합을 하라는 의미였다„는 입장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초석을 굳건히 다져 주시고, 북한의 무력 침공으로부터 지켜내 북한과 같은 공산 국가가 되지 않게 하여, 우리 아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자유가 없는 나라에 살지 않게 해주신 분„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로 배우「신영균(95세)」씨 역시 서울 강동구 고덕동 일대의 4000평을 기념관 부지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아무도 건국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을 추진하지 못했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큰 결심을 하였고 감사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추진위의 일원으로서 기부하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땅은 강변 옆으로 일찍이 이 전대통령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 하여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하니…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전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세웠을 뿐 아니라 6.25 전쟁 때 미국을 참전시켜 영토를 지켜내었고,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고 신영균 회장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은「독립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액 정부 예산으로 추진할 수 있지만, 온 국민의 참여 속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으로「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민 모금으로 70%의 비용을 충당하고 30%는 정부가 지원하는 “민간 주도 사업„으로 추진키로 결정되었습니다. 회사사명서 10조“자선‧ 기부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로 매년 현금 ‧ 제품 등 1억을 기부하고 있는 LCC는, 이런 뜻깊은“건국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5000만 기부를 추가 결정케 되어 대단히 기쁜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수출을 통한 백년기업„이라는 회사 Vision 실현으로 국가 경제에 작은 보탬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저희들은, 앞으로도 계속 범국민 주도의 뜻깊은 행사가 있다면 기꺼이 참여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이사 白 星 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