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발행년도 2007년 4월
제목 아버지



나이가 들면서, 친구나 지인들의 자녀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나 그들의 부모님장례식에 조문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혼례식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지만, 문상의 경우 상주들이 섭섭해하거나 슬픈 표정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밝은 모습 때로는 웃으면서 조문객을 대하는 것이 장례식장의 변화된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장례절차를 전문화된 병원에서 대행해주므로써 상주의 정신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점도 있겠지만, 고인의 나이가 적어도 80 때로는 90이상 100세가 넘는 경우가 많아 상주들에게 “호상”이라는 말로 위로할 수 있기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소득수준의 증가와 의료기술의 발달로 남자 79세 여자 83세로 집계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훨씬더 오래 사시는 것이 일반적 현상인 것 같습니다.

     

몇년전부터 집안 거실에 아버지·어머님 사진을 비치하고 옆에는 항상 서양란화분을 함께 두고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내자식에 대한 애정과 비교해볼 때, 부모님 생전의 자식사랑이 너무나 깊고 컸다는 것을 느끼고 있고, 너무 일찍 세상을 뜨신 섭섭함과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불효의 마음이 “항상 죄인이다”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속죄의 마음으로 사진을 쳐다보는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회사나 개인적 어려움이 생길 때에도 당신께서 바라보는 모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69세, 아버님 77세에 운명하셨으니, 아무리 거절하셨어도 꼭 한번 종합검진이라도 받게하여 건강에 조심할 수 있도록 조치하지 못하였던 「불효」를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경북 성주에서 2남 3녀의 둘째로 태어나셔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어릴때 친척이 살고 있던 밀양으로 이사오셨습니다. 배를 채우기도 힘든 가난으로 학교나 서당에는 가보지도 못하셨지만 한글·한문을 스스로 익히셨고 일본어도 능통하실 정도로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분입니다. 농토도 없었지만 농사로는 가세를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신 당신께서는 일본과 만주에서 막노동도 마다하지않고 장사로 소자본을 만드시어 해방전 밀양에 「백화점」을 개업하셨고, 과수원 경영, 예식장·당구장등 여러가지 새로운 idea로 신규사업을 벌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극장(영화관)경영으로 많은 돈을 버셨지만, 10남매의 유학(대도시에서 공부)비용과 어려운 친척들 뒷바라지에 당신께서는 자신을 위한 곳에는 단한푼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사업가셨습니다. 수많은 사업들을 실패없이 경영하기도 하셨지만, 해방후 농업밖에 없었던 그당시 “농사는 씨뿌려 곡식을 거두는데 1년이 걸리지만, 장사는 1개월이면 자금회전이 되니 농업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뚜렷한 사업감각을 지니셨습니다. 저에게 “성천아! 무엇을 하든 10년은 해야 길이 보인다. 마음 먹은 것을 묵묵하게 견디어내야 한다”라는 말씀도 하셨고, 둘째형이 사준신 color TV를 보시고는 “이제 영화관도 끝났구나”하시면서 극장사업을 정리할 정도로 사업에 대한 결단력도 매우 빠르고 정확하셨습니다. 아마 밀양같은 시골이 아니고, 대도시에서 사업을 하셨더라면 재벌은 아니라하더라도 사업체를 운영하는 큰부자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아버님은 가족사랑도 뛰어나셨지만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조상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셨습니다. 밀양군에서 선정한 「효자상」을 물리치시고 겸손과 부족한 효행을 스스로 자책하신 일은 저희 자식들에게 너무나 큰 귀감이 되어 왔었습니다. 조부모님 살아계신 동안 함께 모시면서,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성은 저희들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이고, 돌아가신 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선산에 들리셨고, 이를 본 마을동네 사람들은 “정말 효자다”라고 칭찬해마지 않았습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아버님이 어렵고 복잡한 가승(우리집 족보)를 만드신 것도 조상숭배와 할아버지·할머니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감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검·절약과 저축이, 가난을 극복하고 잘 살수있다는 희망을 갖게해주는 「커다란 지혜」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고 단한번도 낮잠 주무시는 것을 보지못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생활태도는 저희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10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내시겠다는 아버님의 의지는, “남들 놀때 나도 따라 쉬면, 자식들이 고생한다”라는 말씀은 항상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도 자식들 입시·입학때는 부산·대구를 항상 데리고 다니셨고, 하숙집도 항상 손수 구해주신 것은 자식사랑의 단면이기도 하지만 “공부를 잘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 저희들의 앞날에 대한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LG에 입사할 때, 회사에 함께 오셔서 담당과장에게 “부족한 자식이지만, 앞으로 잘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부탁하신 것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으로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자식을 낳고 키워봐야, 부모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옛말이 있긴 하지만, 겨우 한 둘의 자식으로 겪는 마음고생이 10남매를 키우신 아버님의 자식사랑에 어찌 비교가 될 수 있을까요?

10남매를 낳고·기르시고,대도시로 유학보내고, 그많은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지금의 저희들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만 하셔야 했고, 옷한벌 장만하면 깁고 깁어 10년은 입으셔야 하고, 드시고 싶은 음식도 잡수실 수 없었고, 혹시나하여 병원검진도 마다하실 수 밖에 없었던 당신의 깊은 뜻을 이제야 헤아릴 수 있다니 이얼마나 큰 불효입니까?

큰형님과 제가 의사되는 것이 아버님의 소망이셨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길을 선택한 것도 항상 죄스러웠지만, 늦게나마 중소기업을 창업하여 경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저를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지난 구정제사때, 큰형님께서는 아버님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시면서, “저에게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이세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하시어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순천향병원에서 마지막 투병생활을 하실 때도 큰형님과 남천형은 3개월동안 회사의 모든 일들을 접어두고 간병인없이 밤낮으로 돌보셨지만, 울산에 있다는 핑계로 병상한번 제데로 지키지 못했던 불효를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살아생전 형제간의 우의를 강조하셨듯이, 불행히도 혼자가 되신 누님·형수·제수 식구들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영전에 올립니다. 공장을 방문한 누님께서 “성천아! 아버님이 살아계셔 너희 회사를 둘러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라는 말씀은, LCC를 올바른 길을 걷고 백년동안 쓰러지지않는 우량기업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주고 있습니다.

     

원시시대에는 맹수나 적으로부터 자신은 물론 가족과 재물을 지켜야하는 「힘센 戰士」가 되어야했고, 농경시대에는 쌀독을 가득 채우기 위하여 들판에서 땀을 흘려야하는 「부지런한 농부」가 되어야했고, 산업시대에는 공장이나 머나먼 중동땅에서 가족부양을 위하여 자신의 청춘을 불사르는 조국근대화의 역군이었던 것이 우리들「아버지의 참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아버님은, 「집안의 소」가 되시어 가족들을 위하여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우리 자식들의 학교성적이 기대한만큼 좋지 않아도 “다음에 잘하면 되지”하고 웃으시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셨을 것이고, 어쩌다 선생님이나 주위로부터 칭찬받을 때에는 몹시 기뻐하셨던 일들이 기억납니다. 아버님께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셔서 마치 까만 먹칠을 한 유리같은 마음이라 생각했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에야 아버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아버님 말씀이 깊게 다가오고,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싶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회사를 경영하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조언과 헤쳐나갈 방향을 제시해주시고 격려해 주실텐데....”라는 아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너무나 부족한 자식이지만, 아버님의 크신 뜻에 어긋남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아버님 영전에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대표이사 白 星 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