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발행년도 2019년 6월
제목 일본,한국의 다이소 이야기

경기 불황과 극심한 소비 침체 속에서도「창고형 할인점」과「아울렛」은 빛을 발하고 있는데, 특히 가성비를 앞세운 “1000원 가게” 다이소의 신장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500~ ₩5,000의 제품을 판매하는 다이소는 최근 10년간 평균 년 20%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작년(2018년) 매출 2조원을 넘어섰고, 수익성 역시 매년 6~8%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루 방문객만 70~80만명이 다녀가는 대한민국 대표 생활용품 잡화점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난 1997년 서울 천호동 1호점을 오픈한 이후 다이소 매장은 1300여개로 늘었고, 백화점·할인점·편의점도 아닌 “제4의 유통”으로 불리는「균일가 매장」이 국내에도 안착케 되었습니다.

 

“₩1,000” .... 옛날에는 제법 값어치도 많았지만, 이제는 음료수 한병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1000」이 소중하게 대접받는 곳이 바로「다이소」매장이라, 남녀노소 모두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만남·데이트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 설사 상대방이 늦더라도 만원·이만원 정도로 이것저것 쇼핑하다 보면, 화가 풀리는「마법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합니다.「1000원짜리」제품이라면, 다이소 판매 매장의 마진 30%와 물류비 10%, 본사 수익 5% 정도 감안한다면 구매단가가 ₩500을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500원짜리 제품이 싸구려·엉터리가 아닌,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상품이 되려면 어떤 해법을 가져야 할까요?

다이소의 경영진들은 인건비와 원부자재 비용이 낮은 중국·동남아·남미를 찾아다니며 해외 제품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가격·품질 경쟁력을 갖춘 회사들을 통해 좋은 상품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국내 다이소 매장의 50% 이상이 국산(Made in Korea)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1000원짜리 상품으로 년매출 2조원의 신화를 이룬「다이소 아성산업」의 박정부 회장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구로공단에 있는 풍우실업이라는 조명기구 제조회사에 취직하여 공장장까지 올랐던 평범하고 착실했던 월급쟁이였습니다. 위장 취업자를 중심으로 노조가 결성되어 회사의 위기가 닥치고, Top의 질책과 함께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계속되어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8년 44살의 나이로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케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생활 대신 성취감을 가져다줄 창업회사는「한일 맨파워」였는데, 한국 기업 임직원들의 일본 연수와 세미나를 주로 지원하는 사업이었지만 서서히 경험이 쌓이자 일본 가전·자동차 회사에 생활용품을 공급하는 무역업으로 확대해 나갔다고 합니다.

 

일본 기업들에 생활용품을 수출하던 박회장은, 그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100¥샵」에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상품을 공급케 되었다 합니다. 가격은 저렴하면서도 품질은 높아야 되는 제품·상품을 일본에 개발·공급하다 보니, 한국 내에서도 1000원 매장의 아성산업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다이소 제품들이 가격은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우수한 제품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3년 만에 매장 수는 100개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번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아성산업은, 일본 다이소의 제안을 받아들여 34% 지분 참여가 있었고 이때부터 “다이소 아성산업”의 회사명으로 변경되고 브랜드명 역시 “다이소”로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大創産業(대창산업)의 일본어 발음이 “다이소”였지만, 한국에서는 “다이소에 가면 무엇이든 다 있소”라는 말로 유행되어 마케팅 효과와 인지도 확보에 크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다이소 ₩1000샵」은 독창적인 면도 많이 있고 대부분의 상품을 자체 개발했다는 특징이 있지만, 근원적인 사업 형태는 일본의 Daiso와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 Daiso는 100¥을 중심으로 약 9만개의 상품을 기본적으로 취급하면서, 매월 1000가지의 신상품을 PB(Private Brand)로 개발하고 있다 합니다. 이러한 신상품의 매력에 이끌려 매일 160만명, 연간 6억명의 고객이 다녀가고 있어, 기업의 탁월성·혁신성·국제성 등의「종합 Brand 평가」에서 46위를 차지할 정도의 초우량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47위가 손정의 회장의 Soft Bank, 48위가 미스터 도너츠) 100¥샵의 2위는「Seria」, 3위는「Can Do」, 4위는「Watts」이지만 다이소의 시장 점유율은 60%에 이르고 있어, 압도적인 시장 지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100¥샵이 일본 전역에서 점포를 늘여가며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2000년도, 일본 최대의 소매기업인「다이에」의 반격·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국 270개 점포에「88¥코너」를 설치하여 88¥이라는 파격적인 균일가로「100¥샵」시장을 공략하였고, 당시 M/S 90%의 다이소 산업에게는 큰 위협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독창적인 기획 상품으로 청소용품·부엌용품·학용품 등 300가지 생활필수품을 88¥으로 판매하자 많은 소비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일본 디스카운터 스토어의 지평을 열었던 원조 할인점인「다이에」는「다이소」같은 신흥 디스카운터 스토어를 애써 무시하며 독자적인 사업 영역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4년 후인 2004년 9월「다이에」는 조용히「88¥코너」들을 철수함으로써, 다이에의 완패·다이소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다이에」는「다이소」와의 경쟁을 88과 100¥의 가격 경쟁 구도로 착각하였고, 다이소가 실제로는 100엔의 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쇼핑의 즐거움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일본 다이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이소 극장”의 막이 열리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보통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난 후 관객들은 즐거움·슬픔의 감정만을 기억하지만, 다이소 극장(매장)에 들어온 손님들은 무려 9만개의 상품이 제공하는 놀라움과 감동의 스토리를 충분히 즐기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자신의 손에 들린 5개의 상품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업자「야노」회장은 다이소 점포를 디스카운트 샵이 아닌, “주부들을 위한 레저 랜드” “500¥으로 30분을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시설”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다이소, 100¥샵은 미국의「1달러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1달러샵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전형적인 저가 업태이지만 다이소는 전혀 다르게 고소득층을 포함한 폭넓은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이소를 창업한 야노 회장은, 창업후 회의라는 것을 해본 적 없고 경영 목표나 계획을 세운 적도 없고 “임기응변만이 살 길”이라는 경영철학을 가진 괴짜 CEO입니다. 그는 다이소가 (지금은) 순조롭게 잘 나가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기업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신앙처럼 믿고 있는 기업인입니다. 연간 매출액 4조원이상 그리고 상당한 이익을 매년 창출하는 다이소가, 여전히 그의 고향인 시골 히로시마현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본사를 동경으로 옮기면 너무 많은 기업 정보들이 넘쳐날 것이고 많은 애널리스트·컨설턴트들이 찾아올 것이고, 경영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강연을 해야할 것이 고역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비상장 기업인 다이소가 상장하면 일류 기업, 일류 경영자가 될 것이고, 야노 회장은 일본의 억만장자 랭킹 상위에 들 것이지만 100¥짜리 물건 팔아서 부자 되었다고 욕먹게 되고 그러면 고객들이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노 회장은 1943년 히로시마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주오대학 토목학과 야간부를 졸업했습니다. 전공과는 달리 처가에서 물려받은「양식장」을 경영하다 실패하고, 형제들에게 많은 돈들을 부채로 남기고 야간도주를 실행케 됩니다. 하는 사업마다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트럭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이동판매를 시작했고 상품의 사입 가격에 따라 서로 다른 가격표를 붙여야 하는 일이 가장 큰 애로였습니다. 결국 가격표를 붙이는 시간과 품을 줄이기 위해 모든 상품을 100¥에 파는 대담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100¥샵 비즈니스 모델”이 태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1973년의 오일 쇼크와 계속되는 인플레로 인하여 100¥샵의 비즈니스의 근간이 흔들리고, 동업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100¥샵 사업에서 속속 철수하게 됩니다. 야노 회장은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삼아 100¥샵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고, 다이소의 판매 트럭이 90대를 넘어서기도 했지만 이동 판매업에서 상설 점포 판매업으로 전환케 되어 오늘날의 다이소 매장으로 변모하였던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다이소를 비롯한 100¥샵 소매기업의 출점 형태가 메뚜기떼에 비유되어, 전통적인 소매기업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상 기후의 환경 변화로 인해 갑자기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메뚜기떼처럼, 이상 번식에 불과한 100¥샵도 어느날 소비자의 지지를 잃고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높은 물가 상승으로 일본 열도가 들끓었던 1970년대에 초저가의「100¥샵 비즈니스 모델」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망할 것이라 평가되었고, 1980년도 버블기에는 주식과 부동산 투기에 열광하면서 졸부들이 속출하고 고가의 외제차와 명품 상품이 없어서 못 파는 시대에 “100¥짜리 동전 장사”는 전혀 장래성이 없어 보였고 실제로 상당수의 100¥샵은 문을 닫기도 하였습니다. 야노 회장은 “우리 점포는 고객을 위하여 또는 종업원을 위해 존재한다.”가 아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음을 택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정도로 생지옥을 겪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것이 100¥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는 다이소이지만, “불량재고”“인플레 시대 도래”의 문제들이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다이소 극장」을 표방하면서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강조하는 다이소는, 고객이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상품 구색을 늘릴 수밖에 없어 불량 재고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POS Data 등의 실 팔림새와 재고 관리에 거대한 전산 System을 작동하므로써 불량재고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물가가 내리는 디플레 시대가 계속되어 100¥샵의 운영이 가능했지만, 물가 상승의 인플레 시대와 소비세율의 계속적인 인상은 100¥샵의 운영을 어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2003년부터는 “100¥”을 빼고 “다이소”로만 표기하기 시작했고, 200¥·300¥·500¥ 상품도 상당수 출시하고 있고, 소비세를 별도로 소비자가 부담하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이 한국과 일본의「Daiso 이야기」를 펼치면서, “1000원 샵”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인플레 시대에 앞으로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제 상당수의 협력사들이 원가 압박으로 거래를 중단하고 있고, 또한 원가 상승으로 수익성이 악화되어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최고의 품질·가격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LCC로써는, 각종 원부자재가 상승과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도 자동화·성력화 등의 생산성 증대 노력이 기울여진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고부가가치의 신제품들을 계속 출시하여, 적자 또는 수익성 악화 제품들을 중화시켜 총괄적 매출증대와 수익성 개선 효과를 기대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LCC의 미래인 ORIOX Brand의 이미지 제고에 크나큰 역할을 Daiso 매장은 기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Daiso 매출 100억원을 향하여... 화이팅! 파이팅!







대표이사 白 星 天